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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안상열 세계평회대사진천군지부장
세계평화 지도자 중국 세미나에 다녀와서
2011년 05월 21일 (토) 11:18:11 진천뉴스 gmson8119@hanmail.net
   

지난해 테마가 있는 남북통일 기원 세계평화 지도자 중국 세미나에 본 필자는 참가하게 되었다 .첫째 날 청주 직행버스 터미널에서 인천 공항 가는 새벽 5시 버스를 타고 1시간 40분 걸려 인천 대교에 도착할 시간에는 세계평화 대사 들이 평화를 위해 공산국가인 중국을 찾아가는 것을 하늘은 환영이라도 해 주듯이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우리 의 일행을 서서히 밝게 비추어 주고 있었다.

역사적인 공사기간을 마치고 그 웅장함을 자랑하는 인천대교를 지나 세계 에서 자랑스럽고 세계인이 이용하는 인천공항 의 모습이 보일 즈음 나도 모르게 처음은 아니지만 여기가 한국인가 다시한번 감탄의 말이 입안에서 나도 모르게 나왔다.

인천공항 에는 늦여름 의 날씨에 도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해방 되고 가난에 찌 달리던 우리민족이 그동안 열심히 살어 왔기에 해외여행도 가고 전자제품도 일등국가 가 아닌 가

생활 경기가 좋지 않다고 해도 외국을 나가고 들어오는 사람들은 인산인해 을 이루며 헤여지기 서러워 눈물을 흘리는 젊은 부부의 모습을 뒤로 하고 필자는 오전 9시 50분 비행기 ( OZ 301) 아시아나 비행기로 “ 대련시” 로 출발하여
2시간 30분에 대련 공항에 도착 했다.

대련시내 중국집 음식점에서 중국 음식요리 로 VIP대접을 받으며 즐기고 난후 안중근 의사의 유적지인 여순 감옥 과 여순 헌법 재판소를 방문하게 됐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안중근 의사는 이등 박문을 할빈 역에서 사살한
것으로만 조명 됐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 동양평화” 사상에서 우리는 그가 추구하는 것은 단순한 조선의 민족독립과 평화가 아니라 그 범위가 훨씬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아시아 각 민족의 독립과 해방 이야말로 안중근 의사가 희망 하였던 바이다.

안중근의사는 옥중에서 아시아 평화에 대한 기대를 언급을 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해야심이 있던 없던 나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고 오직 동양평화 에만 고려하고 있다.

나는 (이또히로부미) 이등박문의 잘못된 정책을 증오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안중근 의사는 일본의 침략정책이 조선에 주는 영향에 대해 주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주는 영향에 대해 더욱 중시 했다.

때문에 감옥 관리자가 안중근에게 조선의 장래에 대하여 물었을 때 “이또히로부미의” 죽음은 조선을 놓고보면 천만 다행이라고 했다.

그는 일본 정부가 대외 확장 정책을 포기한다면 동양각국의 평화를 보장 할수 있다고 확신 했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 론에서 일본이 여순 을 중국에게 돌려주고 여순 과 대련 에 개방형 항구를 건설하여 동북아의 무역 중심과 정치 중심으로 만들자고 했다.

또 중.조.일. 3국 평화회의를 소집하고 평화와 지역안보 문제를 논의 하자고 했다.
이것은 단순히 미래의 평화에 대하여 희망한데 그친 것이 아니라 충분히 심사숙고를 통하여 실시 가능한 방한을 내놓고 동양의 평화를 실현 하고자 했다.

전쟁연대에 생활하고 있었던 안중근은 후세들이 평화로운 환경에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면서 독립된 나라에서 국민의 정당한 권리를 누리면서 생활하기를 갈망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말로 안중근의사( 동양평화론) 의 사상적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애증이 분명하고 나라의 치욕을 잊지 말고 조국을 사랑하고 자기민족을 사랑하고 국가이익 과 민족의 이익을 위하여 단결 분투하여 노력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민족이 갖추어야할 위대한 민족 성격이다.

안중근은 바로 이런 위대한 민족정신의 화신이다 라는 것을 알수있다.

안중근이 감옥에서 생활하였던 장소인 여순 감옥은 중국정부에서 잘 보수하여놓고 정부 공무원들이 관리하며 관광객들의 견학장소로 입장료를 받고 있었으며 관광 상품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약 30분 거리에 떨어져있는 여순 헌법재판소로 이동하여 안중근의사가 5회의 재판을 받던 장소로 우리 세계 평화대사 들이 장소로 옮기여 갔을 때 지금도. 그날의 메아리 가 들려오는 듯 가슴이 찡한 마음은 내 가슴에 조선민족의 피가 살아 숨 시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1909년 10월 26일 9시30분 이등 박문은 할 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됨에 따라 1909년 11월 3일 하얼빈 러시아 재판소로부터 일본이 점령 하고 있는 관동주에 인도되어 여순 관동 도독부 지방법원에 재판하기로 결정 된 곳이 우리가 현재 서 있는 곳이라니 가슴이 찢어지는 분노와 아픔을 달래느라 그 자리에 서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참으로 그때를 생각하면 서슬이 퍼런 일본군의 법원이 아 던가 ?

이 법원은 1991년도에 세계일보(주) 에서 한국의 잊혀져가는 안중근의사의 정신을 길이 새기자는 뜻에서 중국정부에 협조 통보를 하고 취재하게 되었으나 당시 중국정부 내에서는 대련시 시민병원으로 사용하고 있던곳 을 얼마 남지 않은 법원 흔적을 찾아 세계일보재단 이사장인 문선명 총재에게 보고하고 우리가 소유하자 는 지시를 받고 모자라는 경비는 모금을 하여 충당 키로 하고 당시 여순 독립기념 사업 회 를 조직하여 초대 안창호 선생 및 두루 독립운동가 들로 조직 되었으나 지금은 대다수 이사들이 돌아가시고 현재 그 당시 세계일보 기자로서 취재를 담당했던 여순 순국 선열기념재단 총경리 재단법인
상임이사인 박귀언 ( 朴貴彦 ) 씨가 현 지방법원 자리를 복원하여 책임자로서 견학 오는 많은 탐방객을 현재 이날까지 맞이 하고 있었다.

이 재판소는 유일하게 중국내에서 한국사람들이 관리하고 있었으며 이 재판소에서 당시 일어났던 사실들의 참고 문헌들 을 참고해서 열거 되새겨 보면 은 다음과 같다.

1910년 2월 7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은 안중근 안건에 대하여 제 1차 재판을 진행했다.

안중근 의사의 대답은 침착 하면서도 조리가 있는 항변에 판사들은 모두 경황실색 하여 어찌 할 바를 몰라 하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는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어조로 왜 이렇게 경황실색 히는 가 ? 나의 말에 “칼”이나 “검”이 숨어 있단 말인가? 아니면 “총” 이나 “
대포 가 있단 말인가? 나는 당당한 대한민국의 국민인데 오늘 일본의 감옥에 수감되고 또 일본법에 따라 재판 받아야 하는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언재 내가 일본에 귀순 한 적이 있는가 ? 판사가 일본 사람이고 검사가 일본 사람이고 변호사가 일본 사람이고 통역관도 일본 사람이며 심지어 방청객도 모두 일본 사람들이다.

이 어찌 벙어리가 연설하고 귀 먹어리 가 방청하는 꿈속에서 나 볼 수 있는 세상이 아니 겠는가? 하고 맹열히 비난 했다고한다.

910년 2월 12일 제 5차 심판에서 안중근은 “이또히로부미 ” ( 이등 박문) 의 죄악은 천지신인이 모두 알고 있다. 고 하면서 나는 개인의 명의로 “모살범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대한의 참모중장의 명의로 중임을 맡고 하얼빈 에 와서 전쟁하는 과정에서 이등박문을 사살하고 포로가 되어 이곳에 왔다.

나는 본래 여순 지방법원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의 안건은 응당 국제공법에 쫓아 재판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하지만 1909년 12월2일 즉 법원에서 아직 정식으로 안건을 심리 하기 전에 당시 일본외상 고무라 쥬 다로 는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미리 밀령을 내려 안중근을 사형에 처하라고 지시 했다.

이에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은 안중근을 사형에 처할 것 이라는 보고를 외무성에 보냈다.

법원의 사형선고에 대해 안중근은 상소를 포기하고 죽음의 시간이 오기전 그 기간 동안 ( 안중근 본인의 일대기) ( 동양평화론 전감 ) 을 집필하려 하였으며 옥중에서 감옥관리들의 요청으로 200여폭의 호기가 넘치는 유묵 작품을 남겼다.

이 유묵 작품들은 여순 감옥과 지방법원 법정에 잘 정돈되어 감옥 벽면에 걸려 있었으며 판결결과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44일간의 옥중 생활을 끝내고 여순 감옥 교형실에서 한많은 목숨을 영원히 순국 했다.

조국을 위해 헌신한 그의 정신과 옥중에서 형성된 동양평화 사상은 영원히 인류사회의 경전 작품으로 길이 빛날 것이며 죽기 전 동생 정근과 공근이 감옥으로 면회를 왔을 때 안중근의사는 동생들에게 나는 어머님에게 효도하지 못함을 용서 하여 줄 것을 전하여 주기를 부탁하니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님은 “ 너는 옳은일 을
한후 체포 되였으며 재판을 받기로 되어 있으니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마라라“ . ”
중근아 너는 대의를 쫓아 죽음을 선택하라 이것이 어머니에 대한 효도라고 하여 어머니의 냉정한 말씀을 전해들은 안중근의 부인과 동생들은 울음바다로 빠뜨렸다고 하니 이 어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정신을 갖지 않았다고 할수 있겠는가?

또한 일본은 죽음의 판결을 내린 숭고한 장소에다 일본 신사를 지을 려고 하였던 곳을 없애버리고 안중근의사의 사당을 모시게 되었으니 우리는 안중근의사의 조국평화를 위해 젊음을 바쳐 왔던가 세게 평화대사일행은 100여 년 전의 일들을 생각하며 사당 앞에서 머리 숙여 참배를 정숙하게 하고 무거운 발길을 다음 견학지인 단동으로 돌려야만 하는 시간이 되었다.

둘째날 압록강에 가장 가까이 접하여 있는 단동에 도착 했다.

빤히 바라다 보이는 북한의 신의주가 한눈에 들어 왔으며 6.25 당시 끊긴 철도는 아직도 이어주지 않고 단동 쪽에서 관광객만 끊어지지 않은 철로 부분 까지만 견학 하고 있었다.

한국계 조선족 가이드 는 몇 일전 김정일과 그의 아들 김정운 이 끊긴철로 옆에 있는 새로놓은 옆 철로를 통해 중국을 들어 왔다고 한다.

그 후의 행적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였다. 우리 평화대사 회원들은 유람선을 타고 끊긴 철로 밑 다리까지 가서 북한쪽의 맞은편 신의주 작은 항구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들과 지척거리에서 서로 손을 흔들며 소리를 힘껏 외쳐보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답변하는 북한쪽의 노동자들의 여운을 뒤로하며 중국쪽으로 돌아 나오면서 민족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고 돌아 와야만 했다.

다음은 일정이 빡빡한 관계로 현재 방영하고 있는 K.B.S 9시 40분 드라마 “근초고왕” 본 거지인 “오녀 산성” (졸본성) 고구려의 첫 도읍지을 견학치 못하고 바로 고구려의 제2도읍지인 광개토대왕 ( 중국인들은 호평대왕 이라고 일컬음) “능”이 있는 곳 (중국지명 ; 집안 )유적지를 6시간 걸려 전세 버스로 달려 왔다.

도착하자마자 광개토대왕 능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집트의 피라밑과 같은 형식을 갖추었다고 하며 7개 이상의 계단으로 처음에는 쌓여 있었을 것이라고 가이드는 설명 했다.

능속의 맨위부분이 철문으로 되어 있는데 중국 군인이 문을 활짝 열어 놓아 관광객들이 구경하게금 하여 놓았다.
우리 일행들이 모여서 참배를 하려고 하였으나 제지를 당하여 못하고 돌아 내려왔다.

자기네 (중국) 대왕인데 왜 남의 나라 국민이 참배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미 중국은 동북공정 (우리는; 동북삼성이라 일컬음)의 역사책을 마무리 짖는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북공정의 뜻은 중국은 55개의 소수민족으로 형성 되어 있는데 동북삼성에 위치하던 고구려는 중국민족의 55개 소수민족중 하나의 부족 국가이며 광개토왕은 자기네 나라의 천황 밑에 있던 호평대왕 이라는 것이다.

이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동북삼성 이라고 부르짖고 잊지 않은가?
능에서 다시 광개토대왕 비 가 서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비각을 높고 크게 세워놓고 중국공무원 여성들이 지키고 관리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떤가?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은 역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가? 초.중.고.학교에서 우리의 역사를 수업시간에 잘 배우고 있는가? 대입고사에 역사와 세계사가 들어 있는가? 그렇치 않다면 누가 관심을 갖겠는가? 우리 조상들이 확보하여 놓았던 땅들이라도 되찿으려고 노력 이라도 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제 겨우 우리의 역사를 학교 교육에 넣으려고 하고 있는 것 같아 기대가 된다 광개토대왕비는 대왕이 어느 지역을 정벌하면 소가 몇 마리 획득곡식이 몇섬 획득 병사들이 몇 백명 귀환 등이 우리 고구려 족으로 왔다는 것을 비석 뒷면에 상세히 적어 놓았던 것을 비석 뒷면만은 누군가가 지워버렸던 흔적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애닮은 사연들을 목격하고 다음 장수왕능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광개토대왕비가 서 있는곳 의 도읍지는 유림 왕 직전 졸본성에서 국내성 이곳 집안으로 옮겻다고 한다. 그 주변에는 장수왕의 고인돌이 4기가 있었으나 3기는 허실이 되고 한군데만 남아 있는데 그 당시 왕이 죽으면 가장 사랑하던 4명의 궁녀들을
고려장하여 고인돌을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셋째날 아침일찍 오전 7시부터 서둘러 간편한 복장으로 우리나라의 명산인 백두산을 진입하기위한 서파지역 ( 백두산 서쪽으로 ) 이동 했다.

투숙 했던 호텔 통화시에서 5시간 걸려 백두산 입구에 다 달은 우리 평화대사 일행들이 버스에서 내려 백두산을 도보로 오르기 시작 하였다.

1개 코스에서 나무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을 왕복으로 하기위해 옆에다가 계단을 하나 더 만들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주차장으로부터 1260개의 나무 계단을 올라가야만 되었다. 산 중턱에 오르니 공기도 맑고 날씨도 쾌청하여 우리는 행운을 잡았다고 한다.

약 1시간에 걸쳐 정상 천지에 오르니 이미 오른 사람들이 많았으며 천지 전체가
한눈에 다 들어 왔다.

같이온 일행들과 추억을 삼기 위해 같이 또는 혼자 사진을 찍기도 했다.

정상 주위에는 나무는 한 그루도 없었으며 작은 들풀 꽃들만 세찬 바람에 흔들리고 그래도 꽃잎들은 반겨주고 있었다. 정상에서의 북한과의 경계는 새끼줄로 매어 놓았으며 넘어가서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하는 데에도 다른 지역에서 온 일행들은 사진을 잘도 찍고 있었다.

우리는 백두산을 다 내려와 호텔로 오는길 에 금강대협곡을 견학하게 되었다.
백두산 천지가 분출 할 적 에 옆에 지역의 지질이 움직이면서 자체 용암이 흘러 70km 계곡을 만들었다고 하며 유럽을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랜드 캐 년” 과 같다고 한다.

넷째날 우리 평화대사 일행들은 심양으로 이동 호텔세미나실에서 지난번 일본 연수를 다녀온 220여명의 현역의원들과 이번 110여명의 회원들이 생활 정치를 추구하기위해 텃밭포럼이라는 것을 만들어 지역의 실생활 에 도움이 되고 살아가기 편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여 세미나를 개최하고 일정을 마치게 됐다.

무사히 동북삼성의 고구려 유적지와 우리의 명산인 백두산과 민족의 얼이 서려있는 여순 법정과 감옥을 다녀오면서 이미 조상들은 100년 전에 현재에 다가올 세상을 예언 하지 안했던가? 고개가 수여진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볼때 교육은 7위 국방은 8위 과학은 6위 정치는 O.E.C.D 국가중 하위 순위인 17위라고 한국의 선진화재단 이사장인 박세일교수(서울대)가 발표 하지 않았던가?

우리 한국 정치의 현실은 지방의원정도라도 할려면 주민들의 어려움이나 불편함을 해결할 수 있고 주민들과 가슴을 열고소통 할수있는 사람은 아랑곳 하지않고 특정한 사람에게 줄 서는 치사한 행동을 하지 않는가?

그 또한 치사한 사람을 자기편이라고 하는 세상 아니던가? 또는 국민속의 이데 오르기의 문제가 지역 살림 발전에 발목을 분명히 잡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현실 정치에서 생활 정치로 바꿔가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대로 내버려 두고 가만히 보고만 있다면 후세들에게 무엇을 남기였다고 할 것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지방생활 정치를 위해 이제는 모두일어나 한 단계 뛰어넘는 세상을 바라 볼 줄 알아야 되지 않겠는가?

필자는 이 기고문을 통해 잃어 버렸던 우리 조상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받들어 이웃과 화목 친목하며 약자를 위해주고 아껴주는 세상을 만들어 세계속 의 한국인이 되자고 외쳐 말씀 드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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